어느 RPG에건 갈등이 필요합니다. "월드북과 캠페인 설정의 중간"을 자처하는 GURPS 실피에나에서, 갈등은 세계에 상당히 구체적인 형태로 내재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만큼 많은 신경이 쓰이는 부분입니다.
선과 악의 대립은 일단 피하기로 했습니다. 그랬다가는 이 나라의 "운명"이 뻔해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플레이어도 캐릭터도 머리 싸매고 고민할 여지가 있어야 운명 또한 빛을 발하게 됩니다.
같은 이유로, 다양한 갈등을 두기로 했습니다. 갈등의 종류가 다양할수록 플레이 역시 다양해집니다. 물론 이런 갈등들은 GURPS 실피에나의 주된 주제인 "운명"과 닿아 있어야 하겠지요. 일단 실피에나라는 나라를 일곱 개의 지방으로 나누고, 각 지방에 중요한 문제들을 설정했습니다. 어떤 문제들은 나라 전체에 공존하고, 어떤 문제들은 특정 지방에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 같이 나라의 운명(또는 그 지방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갈등들입니다. PC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팀이 이야기를 어떻게 끌어나가느냐에 달렸습니다.
갈등이 많은 것은 좋지만, 기준으로 삼을 어떤 축이 있으면 세계에 통일성이 생겨 이해하기도 편해지고 플레이 구상도 수월해집니다. 그래서 "백작가의 후예"와 "혁명의 영웅"이라는 상반된 갈등 요소를 배치했습니다. 양쪽 다 실피에나를 사랑하고, 그 백성들을 아끼고, 모두를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하는 미래의 모습은 서로 다르고, 그러다 보니 취하는 수단도, 설정하는 목표도 다릅니다. 새 백작은 기존의 질서를 어느 정도 유지하는 것이 안정적이며 실용적이라고 생각하고, 혁명정부의 사령관은 구체제를 청산해야 이상적인 나라를 세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백작은 외세를 이용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고, 사령관은 무엇이든 백성 자신의 힘으로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의 차이는 우리 세계의 역사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해하기도 쉽습니다. (실피에나에서 현실 세계와 비슷한 요소가 많이 쓰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백작과 사령관의 갈등이 실피에나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아닙니다. 이 두 영웅들 사이의 반목과 싸움은 어디까지나 PC들이 활동하는 배경을 제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혹 둘 중 하나가 정말로 실피에나를 통일하고 새 시대를 맞이한다 하더라도, PC들의 이야기는 그보다도 빛날 수 있습니다. 마치 스타워즈에서 공화국 대통령이 뭘 했는지는 아무도 몰라도 어느 제다이와 밀수꾼, 통역 로봇의 이름은 다들 알 듯 말이지요. 아예 이 둘의 갈등은 배경으로 돌리고, PC들은 전혀 다른 갈등 속에서 운명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일곱 개의 지방에 다양한 문제거리를 배치하고 두 개의 정치세력을 두었습니다. 백작과 사령관의 땅이 완전히 맞닿아 있다고 하면 전쟁 얘기 밖에 할 게 없을 테니, 둘 사이에 간격을 둡니다. 일곱 지방 중 서쪽 두 개가 백작에게, 동쪽 두 개가 사령관에게 갑니다. 중앙에 있는 세 지방 중 하나에서는 백작군과 혁명군이 대치하고 있고, 다른 두 지방은 아직 어느 세력에 의해서도 점령되지 않았습니다(그리고 그럴만한 이유를 정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유는 핑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후에 지방 설정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등장합니다).
또 하나, 백작과 사령관을 비롯한 주체들이 벌이는 "현실 정치"에서의 갈등, 그리고 캐릭터 레벨에서의 개인적인 갈등과는 아예 다른 갈등의 층을 마련합니다. 이 층에서는 세상 모든 것들이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하늘의 별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가르쳐 주기 위해 있고, 어느 지방 영주의 득세는 단순히 개인의 영달이나 지역 정세의 변화가 아니라 나라의 운명에 상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가난한 모험가가 벌이는 모험에는 사실은 백작과 사령관의 행각을 전부 합한 것보다 더 중요한 뜻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실피에나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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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실피에나에 대한 바램, 혹은 욕심
Tracked from 로키의 로카세나 2007/04/30 05:53 삭제도서출판 초여명에서 겁스용 배경책인 GURPS 실피에나의 출간을 발표하면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저같은 경우 약 2년 전에 국산 d20 규칙인 천명 카라를 예약구매했다가 개발중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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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의 갈등 속에서도 PC들이 영향을 미치고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는 건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잘 구현될지는 봐야 알겠지만요. ( <- 까다로운 소비자)
어쨌든 실피에나, 확실히 많은 생각이 들어간 배경이네요. 마구마구 기대되고 있습니다. 몇년 전에 첫 국산 룰북이었던 천명 카라를 예약했다가 개발 중지로 결국 환불받은 일이 있어서 더 설레인달까요. 게다가 정치물을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에 정치물 캠페인이 잘 지원될 것으로 보이는 실피에나에 더욱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실피에나도 예약구매 가능한가요?
또하나, 벌써부터 캠페인을 생각하며 김칫국물 마시는(?) 질문을 하자면, 진행자가 읽을 수 있는 부분과 참가자가 읽을 수 있는 부분이 따로 있나요, 아니면 진행자만 읽을 수 있는 책인가요? 아니면 참가자도 전부 읽어도 괜찮을까요?
로키/ 예약구매는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걸 결정할 만큼 출간이 가깝지는 않네요 ^^
물론 세계에 숨겨진 비밀이라거나 하는 것도 책에 나오지만, 플레이어가 그런 것을 전부 읽는 쪽이 오히려 도움이 되게 만들 생각입니다.
저는 대체로 실제역사에서는 종종 소모적, 반복적이고 패턴화된 양상을 띄는 정치적 갈등이 "운명"이라는 판타지적 개연성에 의해서 무의미가 아닌 유의미로서 거듭나는 그 연결의 가능성에 특히 기대되는 군요.
"정치적 다툼"과 "운명"은 흔히 판타지 장르에서 네러티브나 분위기에 따라 각각 다뤄지긴 해도 그 둘의 연관된 연결을 진지하게 다루는 것 자체는 흔치 않다는 느낌입니다.
실피에나 관련 글을 읽을 때마다 의문이 드는 것은 이 실피에나의 핵심 중 하나로 운명이라는 것을 제시하는데 과연 어떤 것일까 항상 상상력이 자극되는군요. ㅇㅅㅇ 특히나 선악을 배제한 정치역학 속에서 운명이라는 것이 어느정도 가시화 되어서 드러나내에 따라 그것 자체가 위정자에게 선악의 계념으로 도입되지 않을까 생각도 들구요. 물론 운명이 눈에 보이면 그건 운명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 자체가 가진 신비함이 얼마나 들어날지 벌써 부터 기대가 됩니다.